2017년 12월 24일, '대한민국전통명장협회'가 인준하고 수여하는 '한국전통장례명장'이 국내 최초로 탄생한 날이다. 사회의 어두운 분야로 인식되어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던 상.장례문화가 여타 각계의 우수한 전문가들 및 기능인들과 어깨를 나란히 그 모습을 당당히 드러낸 업계의 신선한 사건이었다. 국내최초 전통장례명장이란 명예를 안은 김진태 ‘의전법인상장풍의례원’ 대표는 하늘문화신문의 기관 추천 케이스로 추천되어 이력과 실적 등 엄격한 심사를 거쳐 명장으로 인준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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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태 명장은 1995년도 장례업계 입문이래 근.현대 고깔염법 최초 출원이후 거의 해마다 각양 상.장례와, 장묘관련 콘텐츠를 연구창안 시연해 왔다. 2012년 국가공인장례지도사, 풍수지리사, 심리상담사 등 자격증 획득하였고 특히 최근 연구 내용으로는 근현대 상여 설경구조체계 시연 및 한국 근현대 염의식 감응구 및 연화대를 최초로 박람회를 통해 공개하였으며 2017년 9월 ‘생활의 달인’ 묘지전문가에 소개되었으며 2018년 1월, 생방송 아침이 좋다 묘지전문가 프로에도 출연했다.
특히 2018년도 2월 ‘상조장례문화박람회’에 부스 출품과 동시에 특별시연을 베풀었고 이어 11월 킨텍스에서 열린 '세계엔딩산업박람회'에서도 부스출품과 특별강연을 통해 해외 전문가들과의 교류에도 주도적으로 활약했다. 동국대 FBA 과정에 입학하여 인적인 교류를 넓히고 중국, 대만, 일본 등 해외 견학에도 적극 참가하여 그 나라 묘지문화의 상세를 탐구하여 자신의 묘지이론을 보다 풍부하게 정립하고 있다, 이처럼 일일이 소개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각양 상.장례관련 연구 실적을 다수 보유하고 있어 가히 대한민국 상.장례 전문가로서 최고의 입지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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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의미에서 기자가 김진태 명장의 ‘의전법인상장풍의례원’을 탐방한 것은 지난 2월 1일이었다. '상장풍의례원'은 김진태 명장의 실제 사업장인 동시에 그의 상장례 연구의 본거지다. 충남 공주시에 소재하는 사업장을 찾은 기자의 첫 인상은 마치 작은 규모의 공원묘원 같은 분위기였다. 장례사업장 치고는 상당히 넓게 느껴진 사업터를 그의 설명을 들으며 천천히 돌아보았다. 묘지 연구를 실제로 현장에 재현한 경내 곳곳 각양 대소 유택 모형들의 의미를 상세히 설명해 주었다. 묘지로 쓰여진 고인돌, 작은 돌무덤들, 왕릉 발굴시에나 볼 수 있는 무덤의 내부구조를 파악할 수 있는 묘도 등을 일일이 설명하는 것이었다.
한 곳에 다수가 집단적으로 심겨진 조경목들을 가리키며 ‘묘지목’이라고 유독 힘주어 설명했다. 단순한 조경목이 아니라 그 나무들에게 너희들은 묘지목이라고 단정적으로 명명했다는 것이다. 마치 우수견을 군대에 데려다가 군견이라고 지명하여 역할을 맡기듯이 ‘묘지목’이라고 정식으로 명명한 조경목이라야 묘지터의 한 구성물로서의 자격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야 그곳이 묘지다운 묘지가 된다는 것이다. 그의 범상치 않은 상.장례 마인드를 읽을 수 있었다.
신령스런 공간이라는 상징의 홍살문으로 경계를 나눈 한쪽 구역에는 매장봉분, 평장봉분, 자연장 등 각종 유택모형을 깔끔히게 조성해 놓았다. 묘지문제로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유택의 구조를 상세히 비교하면서 선택의 도움을 주려는 목적이라고 말했다. 또 사업터 사무실에 덧붙여 불교, 유교, 천주교 등 분야별 용품창고가 마련되어 있었고 마당 한가운데에는 언제라도 출동할 수 있도록 이송차량이 대기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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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브리핑을 대강 마친 후 사무실에 함께 자리 잡았다.
우선 눈부신 활동에 여념이 없는 그의 이력이 궁금했다.
김진태 명장은 전통문화 도시 공주 토박이로서 불교와 전통무속 전문가인 부친의 가르침 아래 각종 사찰 일을 도우며 성장했다. 30대 중반이 된 1995년, 어느 사찰 행사에서 한 장례업자를 만나게 된다. 인연이란 있는 법, 김진태 명장은 그 장례업자를 통해 장례분야에 점차 매료되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장례행사에 따라 다니며 장례일을 익히다가 마침내 영구차를 구입하여 본격적으로 뛰어든 것은 2002년이었다.
충청도 지역의 그때는 거의가 매장이었다. 장례가 발생하면 의례 매장봉분 현장에 가게 된다. 또 개장, 이장 때도 마찬가지다. 자연히 묘지 일이 그의 주된 업무가 되었다. 매장과 개장 및 관련 봉분조성과 하관하는 모습을 눈여겨보게 된다. 김진태 명장은 각기 다르게 마련인 문중 장례절차를 상세히 관찰하는 것은 물론 흙을 파고 광을 만들고 하관하는 일체의 과정을 직접 관찰하고 도우기도 했다. 특히 이장,개장 작업 시에는 파묘한 흙의 종류 및 성분과 시신의 매장 상태의 연관성 등을 일일이 육안으로 관찰하며 자료로 모으게 되었다. 날이 갈수록 묘지에 흥미가 깊어져 거의 미치다 시피 했다고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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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장례와 묘지 현장을 몸으로 뛰며 10년 간 정신없이 몰두하다가 급기야는 뜻을 세우고 계룡산에 입산했다. 100일기도를 두 번 연속 수행 후 하산했다. 그때 음양오행을 깊이 연구해 오던 동생으로부터는 음양오행과 풍수를 사사하기 시작했다. 불교정신을 기반으로 실제 장례,묘지 현장에서 습득한 경험과 이에 덧붙여 음양오행과 풍수 등 지식으로 이론을 정립하면서 독자적인 전문성을 일취월장 실현해 온 것이다. 또 풍수는 땅위의 현상을 주로 다루었지만 그는 땅 아래 진면목까지 눈으로 보고 정리하는 한편 관련 문헌을 찾아 비교 분석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단순한 탁상 이론이 아닌 현장에서 습득한 실제 상황이란 차별성이 독보적이고도 소중한 내용으로 축적해 온 것이다.
지금까지 연구와 축적된 자료가 우리 장묘문화에 어떤 기여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지?
“네, 이러한 연구를 통해 매장문화에 관한 이론의 정립에 기여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봉분 개장과 이장 시 현장 토지의 상황에 따른 파묘의 효율성 제고나 국가정책에 의해 순환식 묘지사용의 이론과 실제를 정립하여 이를 국토의 효율적 이용에 기여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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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극적으로 추구하는 장례문화는 어떤 것인지 현황을 어떻게 보는지?
“특히 동양에서는 장례를 치를 때에는 거의 예외 없이 죽음 후 가게 될 하늘을 상징하는 무엇과 연관이 있습니다. 종래의 우리 칠성판도 북두칠성을 말하는데 북두칠성은 변하지 않는 우주, 즉 영원한 세계를 의미합니다. 중국이나 일본도 마찬가지입니다. 비록 시대에 따라 규격이 축소되거나 의식이 간소화되더라도 북두칠성, 아니면 구름문양으로 하늘세계를 표현한 상징물 표시는 반드시 살아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김영삼 정권 때 ‘역사바로세우기’정책에 의해 조선총독부 건물을 허물고 일제가 말살했던 ‘일월오봉도’ 그림을 만 원권 지폐에 다시 살렸습니다. 일월오봉도(日月五峰圖)는 임금의 권위와, 국가, 나아가 하늘세계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역사는 바로 세웠지만 고유전통의 ‘장례문화 바로세우기는 생략되어 버렸고 더구나 그 이후 국토의 효율적인 이용이란 명분으로한 화장 장려정책에 의해 의례가 간소화되고 칠성판도 불필요해져 버렸습니다. 칠성판을 대신하던 수의 7조각으로 시신 묶음마저 생략되는 등 고인을 보내 드려야 할 하늘세계가 사라져 버렸습니다. 장례가 단순히 물건 처분하듯 의미가 없는 의식으로 변해 버렸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무엇이 가장 긴요하다고 생각하는지?
“장례문화에 있어 우리 것을 찾고 계승하는 것입니다. 최소한 죽음후의 하늘세계를 다시 부활하여 장례행사가 이승과 저승을 연결해 준다는 본래의 의미를 되살려야 합니다.”
김진태 명장은 '상광(喪狂)'이란 아호를 보다시피 상.장례에 미치도록 열중하는 자세를 견지해 왔다. 그러나 스승으로부터 ‘성운거사(星雲居士)’란 법명을 받은 후에 비로소 자기의 존재를 확인하게 되었다는 말도 했다. 그런데 그가 기자에게 보여준 것이 또 하나 있다. 사업터가 도로변에 자리하고 있는데 도로에 인접한 사업터 공간에 작은 장독대를 설치하고 7개의 디딤돌을 바닥에 깔아 북쪽방향과 북두칠성을 표현했다.
비록 길가에 생뚱맞게 자리했지만 '상장례의례원'이란 사업터가 나름의 입지와 존재의미를 갖게 한 것이라는 설명이었다. 기자는 이러한 이야기들을 통해 그가 자기 사업에 대한 주관과 정체성이 뚜렷한 사람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장례는 단순히 시신을 물리적으로 처리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 이후에 또 다른 세계로 고인을 모신다는 생사관을 의례를 통해 현시하는 것일 것이다.
이러한 장례사업자의 사명의식을 한시도 잊지 않고 실천해 나가는 진정한 일꾼을 김진태 명장을 통해 알게 된다. 우리 장례업계의 보배 같이 소중한 존재라는 기자생각이다. 인터뷰를 마칠 시간이 되어 사진 한 장 더 찍자는 기자의 요청에 가정에서는 충실한 내조자요, 직장에서는 손발이 척척 맞는 동업자인 김우포 여사와 함께 다정한 포즈를 취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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