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스님 다비식 화보/ 우리 시대 정신적 큰 스승 법정의 가시는 길을 지켜 보는 국민들은 그 허전한 마음을 무엇으로도 달랠수가 없다. [오마이뉴스]
▶中사회과학원, 조조무덤 맞다 잠정결론 ▶2009년 고고학 6대 발견 지정..추가 연구 필요 ▶중국의 관영 싱크탱크인 사회과학원이 최근 발견된 삼국시대 조조(曺操.155-220)의 것으로 추정되는 무덤이 진짜라는 잠정 결론을 내렸다. 중국 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는 14일 베이징에서 포럼을 갖고 최근 허난(河南)성 안양(安陽)현에서 발굴된 무덤의 고분형태와 연대, 출토된 유골과 유물 등을 근거로 종합적으로 분석한 결과 조조의 무덤이 맞다는 1차 결론에 도달했다고 밝혔다. 사회과학원은 ▲ 무덤 형태가 다른 동한(東漢)시대의 무덤과 같으며 ▲ 무덤의 규모가 황제의 것으로 추정될 만큼 크고 ▲ 삼국지 위서 무제기 등 고대 문헌 기록에도 부합한다는 등 9가지 근거를 제시했다. 이들 근거 중에는 출토된 비문에 위무왕(魏武王)이란 글자가 7번이나 나오며 출토된 유골과 치아 등을 연구한 결과 연구진이 조조의 무덤이란 데 의견일치했다는 점도 포함됐다.사회과학원은 이 같은 근거를 토대로 조조의 무덤이 진짜란 1차 결론을 내리면서 이 무덤을 2009년도 중국에서 발견된 고고학 6대 발견으로 지정했다. 그러나 사회과학원 왕웨이(王巍) 고고학연구소장은 이번 결론은 초보적인 잠정결론
자타가 공인하는 한국의 풍수전문가 최창조 교수가 『새로운 풍수이론』책내고 활동을 재개했다. 서울대 지리학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한국의 자생풍수』『한국의 풍수지리』 『닭이 봉황 되다』등 저서를 통해 풍수 전문가로 세태를풍미하던 그가 침묵을 깨고 입을 열였다. 우리 장묘업계가 주목하는 그를 중앙일보가 인터뷰한 내용을 아래에 소개한다.--------------------------------------------------------------------------- ■중앙일보 인터뷰 기사 ☞ ▶연기·공주도 좋은 땅이지만 한반도 최고 명당은 서울 ▶『새로운 풍수이론』 책 낸 최창조 전 서울대 교수 ‘이리 보면 어린애고 저리 보면 도인(道人)이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는 환갑의 나이에도 수줍음을 적잖이 탔고 주저주저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한껏 몰입해서는 열띤 주장을 펴기도 했다. 왠지 이 세상과는 뚝 떨어진, 아주 먼 곳에서 표표히 살고 있는 듯한 분위기를 주는 사람이었다. 그는 1991년에 서울대 교수(지리학과)를 그만두겠다고 사표를 냈다. 2년 뒤 사표가 수리되자 그때부터 ‘거의 백수’로 살고 있다. 씨름 선수가 권투 선수들하고 있는 것 같아서 그만뒀다
일제 강점기 때 해외에 징용됐다 살아오지 못하고 낯선 땅에 묻히고만 조선인은 얼마나 될까. 수습 가능한 유골은 어느 지역에 얼마나 분포돼 있을까. 태평양 전쟁이 끝나고 64년의 세월이 흘렀는데도 이 문제는 아직도 짙은 안갯속에 가려져 있다. 우리 정부가 실태 파악과 유골 수습을 위해 현지조사에 나선 것은 올해 5월까지 총 580기의 묘지를 찾은 사할린의 경우가 유일하다. 종전에 유골을 봉환받은 사례가 있기는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일본 측이 수습해 자국 사찰 등에 보관하고 있던 유골을 내준 것에 불과하다.◇강제징용 사망자 수는 얼마나=일제는 1938년 국가총동원법을 공포한 이래 조선인들을 일본 본토를 비롯해 중국 만주, 사할린, 남태평양제도 등으로 동원했다. 전장은 물론 군수공장, 광산, 사탕수수 농장, 각종 건축현장 등에 투입된 조선인들은 열악한 환경 속에서 수없이 죽어나갔다. 노무자·군인·군속 등 해외 강제동원 인원은 최소 103만여명(한일협정 6차 회담 회의록)인데, 이 중 사망자는 국내외 통계에 따라 천차만별이지만 대략 20만명으로 추정된다. 이 가운데 일본 정부에 의해 조선인 유골 실체가 공식적으로 파악된 것은 수천명에 불과하다.◇군인·군속 유골은
친박연대 정하균 의원 주최로 지난 2일 국회의원회관에서 열린 ‘안락사 문제 한·일 국제세미나’에서는 ‘생명의 존엄성’이 배제된 채 의료계 주도로 무의미한 연명치료 중단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이날 세미나에서 이상원 총신대 신학대학원 교수는 “고통으로부터 환자를 자유롭게 하는 일이 아무리 선한 의료행위라 하더라도 죽음이라는 수단을 통해 행해져서는 안된다”며 “최선을 다해 환자의 고통 제거를 위해 노력하되 끝끝내 제거되지 않는 고통이 있을 때는 환자로 하여금 고통의 의미를 알게 하고 고통과 더불어 살아가는 길을 제시하며 이 길을 갈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는 방법을 적극적으로 모색해야 한다”고 말했다.이 교수는 “환자가 생명의 종결을 요청한다 하더라도 이 요청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된다”며 “신체적 고통이 있는 환자에게 안락사를 법적으로 허용하면 정신적인 고통을 포함해 비슷한 고통을 가진 모든 환자에게 안락사가 걷잡을 수 없이 확대돼 경계선상에 있는 인간의 생명의 존엄성이 심각한 위기에 봉착하게 된다”고 주장했다. 그는 “혼수상태나 뇌사상태에 있는 환자가 죽음을 원한다는 대리자의 판단은 환자의 의사와는 다를 수 있으며 매우 위험한
◈1. 장군- 형사범 아닌 전쟁포로 ...◈2.전쟁-하얼빈 거사는 군사작전...◈3.사상-동양평회론...◈4.중국-쑨원 위안스카이 추모시 남겨◆10월 26일은 안중근(1879~1910) 의사의 ‘하얼빈 의거’ 100주년을 맞는 날이다. 이를 기리는 다양한 행사가 기획되는 가운데, 최근 중국 하얼빈에 세워졌던 안 의사 동상이 고국으로 돌아와 화제가 되기도 했다. 100년 전 그날, 안 의사는 ‘대한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사살했고, 이듬해 3월 26일 뤼순 감옥 형장에서 31세의 나이로 순국했다. 역사의 기억은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다. 하지만, 해석 이전에 놓쳐서 안 될 것은 사실 그 자체의 문제다. 우리가 소홀히 했던 것은 없었을까. 안 의사, 또 그의 거사와 관련된 사실을 ‘장군’ ‘전쟁’ ‘사상’ ‘중국’이란 4개의 키워드로 되짚어 봤다. 1. 장군 - “난 형사범 아닌 전쟁포로”그는 장군이었다. 우리는 ‘의사(義士)’라는 호칭에 익숙하다. 하지만 당시 그는 자신이 ‘대한의군(大韓義軍) 참모중장(參謀中將)’임을 명백히 했다. 어쩌다 한번 그렇게 말한 것이 아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됐다. 첫 언급은 거사 직후 나왔다. 하얼빈역 구내
모내기가 끝난 논에 산 그림자 어른거리는 풍경이 한 폭의 그림처럼 평화롭고 아름답다. 경기도 파주시 법원읍에 자리한 두루뫼박물관을 찾아가는 길은 까마득히 잊고 지낸 고향의 모습이 그대로 펼쳐진다. 이 맘 때 고향은 어떤 풍경이었던가. 모내기철에는 아궁이 앞의 부지깽이도 뛴다는 속담이 있을 만큼 1년 중 가장 바쁜 그 한 철, 막걸리 주전자를 한 손에 들고 새참 광주리를 머리에 인 아낙이 논배미에 나타나면 모를 심던 일꾼들은 더욱 기운을 냈다. 나이든 세대에겐 눈을 감고도 그릴 수 있는 풍경이지만 요즘 세대들에겐 낯설고 생소한 정경이다. 생태계가 살아 있는 법원리 십리계곡에 위치한 두루뫼박물관은 바로 이들을 위한 장소다. 이 곳에는 현대화 물결에 밀려난 우리 조상들의 손때 묻은 생활용품들을 한 자리에 모아 놓은 민속생활사 전문박물관이다. 토담을 끼고 양지쪽에 자리잡은 장독대와 볏짚으로 만든 터줏자리, 크고 작은 장독들이 옹기종기 머리를 맞댄 맞은 편엔 장승과 솟대가 솟았다. 방앗간, 헛간, 너와집, 신당, 원두막이 고스란히 복원돼 있는 그 곳에 머물다보면 마치 시간을 거슬러 온 듯한 착각이 인다.전시실로 들어가면 더욱 입이 벌어진다. 원삼국, 삼국시대의 토기에
한국 여인이, 그것도 한국무용을 하는 여성이 머리도 깎지 않고, 일본 문화계가 유네스코 인류문화유산으로 등록하려 애쓰는 천년 사찰의 주지가 됐다. “무슨 황당한 소리냐?”고 되묻겠지만 실제로 일어난 일이다. 김묘선(金昴先·51) 씨. 한국 국적을 가진 틀림없는 한국인이다. 물론 삼단 같은 머리도 그대로 가지고 있다. 김씨는 인간문화재 이매방 선생에게서 중요무형문화재 27호인 승무와 97호인 살풀이춤을 이수해 2005년 준(準)문화재가 됐다. 정식 명칭이 ‘전수교육조교’인 준문화재는 인간문화재 후보라는 의미가 있다. 김씨는 인천에 있는 발림무용단을 이끌며, 미국 UCLA의 교환교수로 매달 방미해 한국 춤을 가르쳤다. 그런 김씨가 일본 고찰의 주지가 된 사연은 무엇일까. 그 비밀은 승려도 결혼할 수 있는 일본 불교에 있다. 일본은 4개의 큰 섬으로 이뤄졌는데, 그 가운데 가장 작은 것이 시코쿠(四國)다. 1995년 김씨는 시코쿠를 방문해 황진이처럼 나긋나긋한 춤을 췄다. 이때 그녀에게 한눈에 반한 ‘지족선사’가 환갑 나이의 대일사(大日寺) 주지인 오구리 고에이(大栗弘榮) 스님이었다. 공연이 끝나자 스님은 다짜고짜 청혼을 했다. 사람의 연(緣)이란 정말 아무도 알
◈“일어나지 못해 미안해”헤밍웨이, 임종 때도 익살◈버나드 쇼 “우물쭈물 살다 내 이럴 줄 알았지”◈걸레스님 중광 “괜히 왔다 간다” ▶시대를 밝힌 ‘큰 별’ 김수환 추기경의 묘비에는 “주님은 나의 목자, 나는 아쉬울 것이 없어라”라는 묘비명과 생전의 사목이었던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PRO VOBIS ET PRO MULTIS)”라는 글귀가 새겨졌다. 인간에 대한 한없는 애정이 삶의 이유였던 추기경의 모습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하다. 남은 사람은 떠난 사람이 남긴 마지막 말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그 속에서 무엇을 배울까? 역사 속 위인의 유언과 묘비명을 통해 그 답을 찾을 수 있다.우리나라에서는 삶을 ‘팍팍하다’고 표현하는 경우가 많다. 한 많은 민족정서는 유언이나 묘비명에도 그대로 반영된다. 반면 서양의 묘비명은 예전부터 냉소적이고 재치 있는 형식을 갖추는 것이 일반화돼 있다. 모진 풍파를 겪은 사람일수록 그 재미는 더하다. 100년 가까운 생을 살며 제1, 2차 세계대전을 모두 겪은 영국의 극작가 조지 버나드 쇼(1856~1950)는 묘비에 “우물쭈물 살다 내 이럴 줄 알았지(I knew if I stayed around long enough, som
◈일본장례문화연수기 [대전보건대 이병애] ◈이처럼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기억되는 감동서비스를 기본으로 갖추고 창의적으로 계속 물질적 또는 정신적 질의 향상을 위해 노력한다면 감동서비스를 기억하는 고객은 꼭 다시 그 기업을 찾을 것입니다.------------------------------------------------------------------------- ■일본장례문화견학문 [대전보건대 장례지도과 이병애]■드디어 고대하던 일본장례문화견학을 12월 14일~17일까지 3박 4일동안 다녀왔습니다. 여행기간 동안 겪었던 일들과 느낌은 너무나 많지만 가장 인상 깊었던 내용들만 적어봅니다.입학하면서부터 교수님과 선배님들로부터 매년마다 다녀오신 일본견학이 얼마나 스스로에게 큰 도움이 되셨는지 많은 이야기를 전해 들어 왔었고 꼭 가볼만한 좋은 경험이라며 추천해주셨기 때문에 어쩌면 오랫동안 기다려 온 여행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이번 일정이 잡히자마자 서둘러 준비를 시작했고 내가 일본여행을 가서 얻어올 것은 무엇일까? 곰곰히 생각하며 출발당일인 14일 일요일, 새벽에 밤잠까지 설쳐가며 서둘러 대전에서 인천국제공항으로 향했습니다. 도착해보니 여행기간동안 함께할 김
▶‘Funeral Business Fair 2008’ 과 관련시설 견학 ▶가는곳마다 마다 벤치마킹에 열중하는 모습들 인상적 ▶2008년 일본장례문화 연수는 예년에 볼 수 없었던 알찬내용으로 순조롭게 진행되어 성공적으로 마무리했다. 38명으로 구성되어 3박 4일간 계속된 연수는 장제장(화장장), 장례식장, 도시형 수목장, 최신 트랜드의 신개념장례식장 및 유서 깊은 고찰 탐방 등 알찬 내용으로 가득했다. 참가자 면면을 보면 장례학과 교수들, 장례식장, 상조회사, 건축설계사무소, 건축인테리어 전문가, 수목장 관계자, 가장 역사 깊은 공원묘원 관계자, 장묘시설업자, 장례컨설턴트 등 그야말로 다양한 분야의 전문인들이 3박 4일간의 일정을 함께하며 교제를 더욱 두터이 했다.무엇보다 금번 일본연수의 전 일정에 걸쳐 해당 시설마다 담당자의 안내와 상세한 브리핑을 받은 공식일정 성격이었다는 것이다. 우라야스 장제장에서는 우라야스시 담당공무원이, 장례식장 2곳에서는 담당 책임자가 친절한 브리핑의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또 요코하마 수목장 메모리얼그린에서도 담당공무원이 일일이 앞장서서 안내하는 배려를 해 주었고 96년 전통의 사설화장장에서는 여사장이 친절하게 안내하고 하세데라
●“한국장례문화를 되돌아본 유익한 연수였다” ●‘08해외장례문화연수단’의 4박5일 일정은 우리 장례업계에 큰 획을 긋는 성과를 거두었다.4월22일 이른 아침부터 26일 저녁까지 빈틈없이 짜여진 스케쥴을 소화하느라 52명의 연수단 일행은 잠시도 여유롭게 쉴 틈이 없을 정도였다.AFE2008 아시아장례박람회에서는 비록 부스는 참가하지 않았지만 52명의 큰 인원이 주최 측이 주관하는 디너행사에 참석하여 여러 나라 사업자들과 상견례를 가지고 명함을 교환 하는 등 국제교류의 일익을 담당했다. 홍콩의 가장 주요한 장사시설의 하나인 ‘동화의장’에서는 책임자가 직접 나와 친절하게 현황을 브리핑해 주었고 좀처럼 공개하지 않는 원칙을 깨고 내부 깊숙이 안치된 특별한 고인의 관을 직접 견학하도록 허락해 주기도 했다. 또 대만에서는 중화빈장예의협회(中華殯葬禮儀協會) 허정치(許正治)부이사장과 송아분(宋亞芬)부비서장 및 이민봉(李民鋒) 중화예의 총편집장이 직접 마중을 나와 대만에서 가장 큰 장례시설인 ‘제2빈의관’의 현대적인 시설을 관장이 직접 곳곳을 안내하며 브리핑을 하도록 주선해 주었고 우리 일행을 위해 특별히 마련된 장소에서 상견례를 가지고 친선을 돈독히 했다. 타이페이市
●서비스를 통해 감동을 주고자 노력하는 모습 역력●종사자들의 몸에 밴 서비스 정신●장례회사가 주민들을 대상으로 세미나 개최●일본장례문화의 진수는 종합 연출●FBI요원처럼 한치의 실수도 허락지않는 서비스●장례식장소가 호텔 연회장 같은 분위기 우리 장례문화도 많은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특히 관련학과가 전국에 걸쳐 10여곳에 개설되어 젊은 일꾼들을 양성해 내고 있다. 대전보건대학에서는 국내 최초로 학교의 후원으로 장례지도과 학생 3명을 이웃 일본의 선진 장례문화 연수 목적으로 지난 1월 20일 파견했다. 장례문화의 핵심인 서비스의 질적 향상과 컨텐츠 개발 등 젊은 인재들이 보다 많은 것을 배워 관련학문 발전과 국가간의 상호교류에 이바지하게 된 점에 큰 의미를 두고자 한다. 이에 본지에서는 학생들의 생생한 연수 과정을 직접 쓴 글을 통해 몇 차례에 걸쳐 소개하면서 협조해 준 학교와 학생에게 사의를 표한다. 참고로 이글을 쓴 학생은 대전보건대학 장례지도학과 1학년 곽민수양이고, 가나가와현 와다회사에는 2학년 김준구군, 이민족군이 연수중입니다.
●터번 쓴 서역의 8척 장수, 신라왕릉을 수호 ●실크로드 따라 골드 러시… 국제도시 경주로 ●용강 고분 서역인 문관상… 관직도 진출한듯 ●경북 경주 시내에서 울산 가는 길의 한적한 도로변에 있는 신라 괘릉(掛陵). 8세기 통일신라 원성왕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곳. 여기 있던 작은 연못에 왕의 유해를 걸어 놓았다고 해서 괘릉이란 이름이 붙었다. 그 괘릉에 들어서면 무시무시한 풍모의 페르시아 사내가 떡 하니 버티고 서 있다. 바로 페르시아인 조각상 한 쌍. 8세기 신라왕의 무덤 앞에 어떻게 페르시아인이 조각돼 있는 것일까. ◆신라왕을 지키는 무시무시한 페르시아인 당시 신라 경주는 문물이 번창했던 국제도시였다. 그 명성에 걸맞게 멀리는 유럽의 로마, 페르시아에서부터 가깝게는 중국과 일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인종의 외국인들이 드나들었다. 그 흔적을 보여주는 대표 유물이 괘릉의 페르시아 무인상 2구(각 높이 257cm)다. 이 주인공이 페르시아인이라는 사실은 얼굴에서 찾아볼 수 있다. 깊숙한 눈, 우뚝 솟은 매부리코 등 전체적인 얼굴 형상이 페르시아풍이다. 이를 흔히 심목고비(深目高鼻)라고 한다. 귀 밑에서 턱으로 흐르는 수염 역시 우리 모습이 아니라 페르시아 모습이다
이집트 수도 카이로는 거대한 무덤 구역이 시내 한 복판에 있다는 점이 독특하다. 죽은 사람의 도시(Cities of the Dead)라고 불리는 무덤 구역은 12세기 건축물 ‘살라딘 성’의 남북으로 수 킬로미터에 걸쳐 있다. 무덤 구역은 카이로 시내를 북서쪽에서 남동쪽으로 가로지르는 간선도로 ‘샤리아 살라흐 살림’을 따라 차를 타고 가면 보인다. 카이로를 처음 여행하는 사람들은 낡은 이슬람식 석조 건물들이 가득한 지역을 차창 밖으로 보고, 이 지역이 둘러볼 가치가 있는지 잘 감이 오지 않는다. 눈 앞에 우뚝 서있는 ‘살라딘 성’에 시선을 뺐기기 쉽다. 죽은 사람의 도시는 아랍어로는 ‘아라파’(표기는 Al-Qarafa,발음과는 다르다), 영어로는 ‘네크로폴리스’(Necropolis)라고 한다. 이 지역에는 중세 이집트의 술탄과 그의 아미르들(귀족), 그리고 그의 가족 무덤 수 천 개가 있는 이집트 역사와 문화의 보물 창고다.‘죽은 사람의 도시’에는 ‘망자(亡者)’뿐만 아니라, 산 사람도 다수 살고 있다. 빈민들이 무덤 집에서 살고 있다. 그 수가 500만명이라는 주장도 있다. 이집트인은 무덤을 한국과 다르게 묘역에 천정이 있는 집을 만들기 때문에, 산 사람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