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54년 이청준이 고향 장흥을 떠나 도회지 중학교로 유학가기 전날 이청준 모자는 개펄로 나갔다. 홀어머니는 몹시도 가난했지만 아들을 맡아 줄 친척집에 빈손으로 보낼 순 없었다. 모자는 막막하고 애틋한 마음으로 한나절 게를 잡았다. 이튿날 이청준이 긴 버스길 끝에 친척집에 닿자 게들은 상해서 고약한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친척집 누님이 코를 막고 게자루를 쓰레기통에 버렸을 때 이청준은 자신이 버려진 듯 비참한 마음이었다. |
▶어머니는 가난에 치여 집까지 팔았지만 그 사실을 고향에 다니러 온 고교생 이청준에게 숨겼다. 어머니는 주인 허락을 얻어 내 집인 양 아들에게 밥을 해먹이고 하룻밤 잠까지 재워 보냈다. 어머니는 신새벽 눈 쌓인 산길을 걸어 아들을 읍내까지 배웅하고 돌아선다. 눈길엔 모자가 걸어왔던 발자국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어머니는 아들의 목소리와 온기가 밴 아들의 발자국만 밟고 온다. |
▶1996년 어머니를 보내드린 뒤 이청준은 임권택에게 어머니 상을 치르며 겪은 일화들을 얘기했다. 임권택은 그걸 영화로 만들자 했고 두 사람이 함께 소설과 영화로 쓰고 찍은 작품이 "축제"다. 이청준은 "내 소설의 기둥은 어머니"라고 했다. "소설을 쓰게 해주는 힘과 인연이 어머니에게서 비롯된다"고 했다. 어머니는 이청준이 영원히 말리지 못한 젖은 옷 한 벌, 그의 정신의 피륙이었다. 그가 어머니에게로 돌아갔다. "나는 어머님의 심부름으로 이 세상에 나왔다가/ 이제 어머님 심부름 다 마치고/ 어머니께 돌아왔습니다"(조병화 "꿈의 귀향"). 원문 [조선일보] 발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