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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 전도사’ 당신을 잊지않을께요

 
- 삶의 소중함을 일깨워준 그가 영원한 안식에 들어갔다. 13일 고 장영희 교수의 장례미사가 서강대에서 열렸다
▶장영희 교수 오늘 발인
▶“상큼한 글과 상큼한 마음씨 장영희 교수 그 자체가 희망”
▶가수 조영남 생전의 우정 떠올리며 애도
▶“고인은 눈물을 미소로 바꿀 수 있는 영혼의 연금술사였다.” “우리도 너를 위해 기도하마. 영희야, 안녕.” 13일 오전 서울 마포구 신수동 서강대학교 이냐시오 성당에서 고(故) 장영희(57) 서강대 교수의 장례미사가 열렸다. 이 자리에는 유족과 교직원, 학생 등 600여명이 찾아 고인의 넋을 기렸다. 좌석(460석)에 채 앉지 못한 참례객들은 성당 문밖까지 서서 인산인해를 이뤄 끝까지 고인의 가는 길을 지켰다.

이날 미사 강론에 나선 류해욱 신부는 칼릴 지브란의 ‘눈물과 미소’를 인용하며 고인을 보냈다. 그는 “고인은 어느 누구 못지않게 눈물로 상징되는 고통이 많았지만 눈물을 미소로 바꿀 수 있는 영혼의 연금술사였다”며 “이제 살아갈 기적은 우리의 몫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강론과 추도사가 이어지는 미사 내내 여기저기서 유족과 교직원, 학생 등 참배객들의 고인을 그리는 흐느낌이 끊이지 않았다. 미사가 끝나고 장 교수의 가족과 지인들은 장 교수의 장지인 천안 공원묘지를 향해 떠났다.

고 장 교수는 한국 번역문학의 태두라 일컬어지는 고(故) 장왕록 씨의 딸로 그 역시 영문학자 겸 번역가로 활동해 왔다. 고인은 생후 1년 만에 두 다리를 쓰지 못하는 소아마비 1급 장애인이 됐지만 휠체어를 타고 생활하며 뛰어난 영문학자이자 수필가, 번역가로 활동했다.

미국 뉴욕주립대에서 영문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이후 서강대 강단에 서오다 말년에 9년에 걸쳐 세 차례나 암 투병을 이어가면서도 교수는 물론 계속해서 다양한 사회 활동, 논문과 수필집 등 작품 활동을 벌여와 조명을 받았다.

서강대 손병두 총장은 미사 말미에 가진 고별사에서 “교수님을 떠나보내는 이 순간 제 여동생처럼 ‘영희야’라고 다정하게 부르고 싶다. 이번에도 제 청을 기쁘게 받아주시겠죠”라며 흐느껴 참석자들의 눈시울을 붉혔다.

“영희야, 수고했다. 잘 가거라. 천국에서 아버님도 만나고…환한 미소와 고운 목소리로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려. 그리고 우리도 너를 위해 기도하마. 영희야, 안녕.”

▶“상큼한 글과 상큼한 마음씨 장영희 교수 그 자체가 희망”
▶가수 조영남 생전의 우정 떠올리며 애도

“장영희 교수는 내가 본 사람 중에 삶을 가장 충실히 살아내는 사람이었고 그 자체가 희망이었습니다.” 암 투병 중에도 굴하지 않고 강단에서 학생과 시민들에게 희망을 줬던 고(故) 장영희(영미어문·영어문화학부) 서강대 교수의 빈소를 다녀간 가수 조영남씨는 12일 문화일보와의 전화통화에서 생전의 장 교수를 떠올리며 애도의 뜻을 표했다.

조씨와 장 교수의 인연은 지난 2002년부터 시작됐다. 조씨가 모 방송국에서 인터뷰 프로그램을 진행하며 장 교수를 초청했는데 조씨는 처음 본 장 교수에 대해 “평소 글을 보면서 느낀 대로 실제로 상큼했고 목소리도 청아했다”고 기억했다.

이후 2004년 장 교수의 아버지이자 유명한 영문학자였던 고 장왕록 교수의 10주기 출판 기념회때는 조씨가 직접 축가를 불러주기도 했다. 조씨는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친해져 2005년 내 환갑잔치 땐 장영희가 큰 케이크에 내 사진을 박아서 선물해 주기도 했다”며 추억을 떠올렸다.

조씨는 장 교수와 지난 3월 작고한 서양화가 고 김점선씨, 주철환 전 MBC PD 등이 함께 있는 자리에서 장 교수 한 사람만을 위한 단독 콘서트를 열어줬다. 조씨가 독도 영유권 분쟁 등과 관련해 일본측 대응을 칭찬했다가 여론의 질타를 받을 때에는 장 교수가 장문의 편지와 책을 보내 위로하기도 했다. 그는 “생전에 ‘내가 당신을 많이 좋아한다’고 말했어야 했는데 후회스럽다”며 장 교수와의 짧은 인연에 대한 아쉬움을 표했다.
 
- ▲ 장영희 교수가 지난 2005년 3월 척추암으로 강의를 중단한 지 6개월 만에 강단에 복귀하며 제자들의 환영을 받던 모습.
▶그녀의 삶, 그 자체가 기적이었다.
▶우리 가슴에 꺼지지 않을 "희망의 불씨" 피우고… 떠나간 장영희 교수
▶"끝이 안 보이는 항암 치료에 몸도 마음도 지쳐가지만, 독자에게 한 내 말에 충실하기 위해서라도 열심히 희망을 연구하고 실험하리라. 이 추운 겨울이 지나고 내년 봄 연구년이 끝날 무렵에 멋진 연구 결과를 발표할 수 있다면, 난 지금 세상에서 가장 보람된 연구년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작년 12월 장영희 서강대 교수가 본지에 보내온 "2008 겨울, 희망편지―비켜라, 암!, 내가 간다"의 마지막 구절이다.

9일 타계한 장 교수는 본지 칼럼 "문학의 숲, 고전의 바다" "영미시(英美詩) 산책" "아침논단" 등을 통해 고난에 굴복하지 않는 도전 정신과 긍정적 삶의 자세를 보여줌으로써 독자들에게 희망을 안겨준 작가였다. 서강대 영문과를 졸업한 장 교수는 미국 뉴욕주립대에서 영문학 박사 학위를 받았고 1995년부터 서강대 교수로 재직해왔다. 김현승의 시를 번역해서 한국문학번역상을 수상했고, 수필집 "내 생애 단 한번"으로 올해의 문장상을 받았다.

어릴 적 소아마비를 앓아 두 다리가 불편했던 고인은 2001년 유방암에 걸렸으나 두 번의 수술과 방사선 치료를 받은 끝에 회복됐다. 그러나 2004년 9월 척추로 암이 옮아왔다. "신(神)은 인간의 계획을 싫어하시는 모양이다. 올가을 나는 계획이 참 많았다." 장 교수는 당시 3년간 본지에 연재하던 칼럼 "장영희의 문학의 숲" 중단을 알리는 마지막 글을 이렇게 시작했다. 이어 "신은 다시 일어서는 법을 가르치기 위해 넘어뜨린다고 나는 믿는다"고 썼다. 이런 다짐대로, 그는 오뚝이처럼 병마를 이기고 이듬해 강단에 다시 섰다. 그러나 지난해 암이 간까지 전이되면서 학교를 휴직하고 최근까지 치료를 받아왔다.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던 장 교수는 9일 눈을 감았다. 장 교수는 세 차례에 걸쳐 암과 싸우면서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2006년 두 번째 암 투병을 이겨낸 뒤에는 이렇게 썼다. "지난 3년간 내가 살아온 나날은 어쩌면 "기적"인지도 모른다. 힘들어서, 아파서, 너무 짐이 무거워서 어떻게 살까 늘 노심초사했고 고통의 나날이 끝나지 않을 것 같았는데, 결국은 하루하루를 성실하게, 열심히 살며 잘 이겨 냈다. 그리고 이제 그런 내공의 힘으로 더욱 아름다운 기적을 만들어 갈 것이다." 장 교수는 투병 기간 중에도 "문학의 숲을 거닐다" "생일" "축복" 등의 책을 펴냈다.

장 교수는 장애우의 정당한 권익을 찾기 위해서 실천에 나선 행동가였다. 2001년 미국 하버드대 방문교수 시절, 7층짜리 아파트의 엘리베이터가 고장 나 꼭대기 층에 살던 그는 3주 동안 계단을 오르내려야 했다. 장 교수는 이 아파트를 관리하던 보스턴 굴지의 부동산 회사를 상대로 싸워 사과와 함께 보상을 받아냈다.

유력 일간지 "보스턴 글로브"는 장 교수의 스토리를 머리기사로 소개했고, NBC TV와 지역 방송들도 앞다퉈 소개해 5400만 미국 장애인의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장 교수는 당시 인터뷰에서 "장애인 학생들에게 "스스로 일어서라"고 가르쳐온 내가 적당히 타협할 수는 없었다"고 말했다.

장영희 교수는 최근까지 에세이집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샘터)을 마무리하느라 바빴다. 유작(遺作)이 된 이 책 프롤로그에서 그는 "생각해 보니, 나는 지금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기적을 원한다. 암에 걸리면 죽을 확률이 더 크고, 확률에 위배되는 것은 "기적"이기 때문"이라며 삶에 대한 강한 집념을 적었다.

"우리가 살아가는 하루하루가 기적"이라며 삶의 소중함을 일깨워준 그는 이제 영원한 안식에 들어갔다. 10일 빈소를 찾은 손병두 서강대 총장은 "투병 사실을 듣고, 장 교수에게 강의 수를 줄이라고 권유했는데 듣지 않았다"고 안타까워했다.

그는 떠났다. 하지만 암과 싸우고 있는 환자와 그 가족들, 장애로 힘들어하는 이들의 마음속에 "장영희"라는 따뜻한 촛불은 영원히 남을 것이다.

독신이었던 장영희 교수의 유족으로는 어머니 이길자 여사와 오빠 장병우 전 LG 오티스 대표, 언니 장영자씨, 여동생 영주·영림·순복씨 등이 있다. 장 교수의 정신적·학문적 후원자였던 아버지 고(故) 장왕록 서울대 명예교수는 1994년 심장마비로 먼저 세상을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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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교만큼 중요한 죽음준비 -김영심 웰다잉전문강사 임신 10달동안 태명에서부터 음식, 음악, 독서, 태담, 동화, 영어와 수학으로 학습태교까지 하고 있다. 태어날 아기를 위해 정성스럽게 최선을 다해 태아교육을 하고 있다. 탄생만큼 중요한 죽음은 어떻게 하고 있는지? 묻고 싶다. 보건소나 노인대학 강의시 죽음준비를 하고 계신가요?라고 물으면 “나는 죽음준비 다 해놓았어요.”라고 대답을 하시는 분이 계신다. 어떻게 하셨느냐?고 물으니 윤달이 있어서 수의를 해 놓았고 영정사진도 찍었다고 하신다. 결국 수의와 영정사진만이 죽음준비를 대신하고 있다. 죽음준비 강의 후에 ‘내가 죽는다는 것은 생각을 안 해봤는데 죽는다고 생각하니 서글프다’ ‘죽음에 대해 막연히 두려웠는데 오늘 강의를 듣고 나니 오히려 편안해지네요.’ ‘사는동안 잘살고 죽음도 잘 받아 들여야겠어요.’ ‘확 깨게 만들어 주셔서 감사해요’ ‘집에 가서 자식들하고 나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겠네요’ ‘이런 강의 처음 들었어요’ ‘죽음에 대해 생각하고 준비해야한다는 생각을 갖게 되어 좋은 시간이었어요.’ 등 긍정적인 피드백을 주셔서 감사하고 있다. 처음에는 학장님이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는 사람들에게 죽음 이야기는 하지 마세요’라며 못을 박으며 ‘신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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