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낳은 자녀 국적도 가지가지 ▶10년 전, 미국인 남편 허먼 잽(Zapp·41)과 아르헨티나인 아내 칸델라리아 쇼벳(Chovet·39)은 아르헨티나에서 자동차를 몰고 세계일주에 나섰다. 결혼 6년째였고, 아이는 없었다. 둘은 남미·북미·오세아니아 등 30개가 넘는 나라를 거쳐 뉴질랜드에서 배를 타고 최근 한국에 왔다. 그 사이, 아이가 넷 생겼다. 국적이 가지가지다. 맏이 팜파(Pampa·8)는 미국에서, 둘째 테우에(Tehue·5)는 아르헨티나에서, 셋째인 외동딸 팔로마(Paloma·3)는 캐나다에서, 그리고 15개월 된 막내 왈라비(Wallaby)는 호주에서 태어났다. 단둘이던 가족이 여섯이 된 것이다. 이들은 최고 시속이 불과 50㎞인, 82년이나 된 중고차를 몰고 다닌다. 차체가 길고, 타이어 휠은 나무로 된 1928년형 미국산 "그레이엄 페이지"다. 짐도 소박하다. 커다란 가방 두개뿐이다. 지난 28일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에 들른 이들을 만났다. 10년이나 세계여행을 했는데도 변변한 기념품 하나 없기에 왜 그러느냐고 물었다. 부부는 "살아 있는 기념품이 있는데 따로 살 필요가 없었다"고 했다. 아이들 얘기다. 코발트색 초고령 자동차는 연료와 속도계기판이 고장 났을 정도로 엉망이다. 그렇지만 부부는 "여기저기 천천히 둘러보기엔 너무 좋은, 단순하고 느린 차"라고 자랑한다. 여행비는 남미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북극권인 알래스카까지의 여정을 담은 책 "꿈을 키워라(Spark Your Dream)"를 팔아 충당하고 있다. 출판사에서 인세를 보내오지 않으면 교회나 공원에서 권당 25달러에 직접 판다. 2000년 1월 25일, 부부는 어릴 적부터 꿈이던 세계여행을 떠났다. 무슨 기록을 세울 생각도, 정확하게 무엇을 얻을 생각도 없었다. 그냥 "우주에서 가장 아름다운 별"이라는 지구를 다 보고 싶었다고 한다. 하지만 6개월 만에 위기가 왔다. 적도 아래 에콰도르에서 돈이 바닥났다. 아내는 그림을 그리고 남편은 액자를 만들어 팔았다. 평생 첫 품팔이였지만 성공적이었고, 그들의 꿈은 이어져 갔다. |
에콰도르에서 브라질 마나우스까지 수천km 아마존 정글을 지날 때는 차를 실은 뗏목이 떠내려가 짐을 모두 잃을 뻔했다. 페루 리마에서는 칼을 든 떼강도에게 화를 당할 뻔도 했다. 돈이 떨어지거나, 입국을 거부당하거나, 차가 고장 나 며칠 발이 묶이는 정도는 "별일"도 아니었다. 부부는 "모든 어려움을 "만남"으로 극복했다"고 말했다. 긴 여행을 하다 보면 산도 바다도 비슷해 보일 때가 있다고 한다. 하지만 사람은 다 달라서 신기했고, 대부분 친절했다. "꿈을 위해 여행한다"는 말에 사람들은 그들에게 선뜻 잠자리와 음식을 제공했다. "아이들에게 따로 가르치는 것은 없어요. 다만 사람이 얼마나 멋진 존재인지, 꿈을 좇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세상에 나보다 더 중요한 사람도 덜 중요한 사람도 없음을 알았으면 해요." 부부는 "빈손으로 시작했지만 기쁨과 사랑의 기억을 갖고 돌아간다면 더 바랄 게 뭐냐"고 했다. 부산항으로 입국한 이들은 동해안 국도를 따라 강릉까지 북상했다가 서울에 왔다. 그리고 29일 서해안 도로를 타고 다시 부산을 향해 떠났다. 다음은 일본, 그다음은 러시아, 그리고 중국을 두루 본 뒤 아시아 여행을 마무리할 계획이다. 그러나 이것도 유동적이다. "언제까지 여행할지를 정하는 건 언제까지 살 것인가를 정하는 것과 비슷해요. 아무도 모르죠." 부부는 막내가 쓰는 유모차를 차 뒤에 단단히 묶고, 지붕에 얹은 트렁크들도 살피며 말했다 "우리 할아버지는 내게 "멀리 가고 싶다면 천천히 가야 한다"고 늘 말씀하셨습니다. 이보다 더 느린 차를 본적이 있습니까?" 그리고 처음 만날 때와 같은 환한 미소를 지으며 서울을 떠났다.[조선일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