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까지 확인된 유구는 약 265기로 청동기시대 주거지 23기, 석관묘 1기, 철기(원삼국)~삼국시대(한성백제) 주거지 약 120기, 수혈유구 약 120기 등이다. 유물 중 대부분이 철기~삼국시대의 유구로 북한강 상류지역에서 처음으로 발굴 조사된 한성 백제기의 대단위 취락유적인 것으로 조사됐다. 주거지의 평면 형태는 철자형(凸字形)과 여자형(呂字形)이 대부분인데, 출입구의 반대쪽 단벽이 직선ㆍ곡선ㆍ둔각으로 다양하게 확인되고 있으며, 출입구 쪽의 단벽도 직선인 것과 둔각으로 변화된 것이 확인되는 등 시간적 변화상을 잘 보여주고 있다. 조사단은 “일부 주거지는 화재로 폐기되면서 벽체로 사용된 판재와 가구 부재들이 고스란히 출토돼 당시 가옥구조를 복원하는 기초 자료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특히 부뚜막의 아궁이 부분은 옛날 점토 띠 식 노지와 동일한 형태를 보여, 재래의 토착민이 상용(常用)하던 노지에서 부뚜막으로 변화하는 과도기적인 양상을 보여 준다. 또한 백제 한성기의 유물 광구단경호, 무뉴식뚜껑, 흑색마연토기 등이 다량으로 출토된 점은 백제 전기의 동쪽 경계를 나눌 수 있는 결정적 자료인 동시에 한성에서 유행하던 중앙 양식의 토기가 지방으로 전파되는 확산 과정을 살펴볼 수 있는 획기적인 자료로 밝혀졌다. 한편 주거지와 폐기장으로 추정되는 일부 구덩이에서는 인골 편과 짐승 뼈가 출토됐으며, 팥으로 추정되는 곡물들도 발견됐다. 화천 원천리 유적에서는 철제 농기구나 마구류 등도 발견돼 한반도 중부지방에서는 이례적인 출토 사례로 드러났다. 금속유물 발견은 한반도 마구류 및 갑옷류의 기원과 전파 과정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될 것으로 보인다. 이밖에도 유리 귀걸이와 구슬, 옥 등 금동 장신구도 발견돼 원천리 취락 지배층의 위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으로 조사됐다. 원천리 유적 발굴단에 따르면 원천리 유적은 기원후 3세기경부터 4세기경을 중심으로 영위됐던 마을로 추측되며, 특히 백제가 한성시대 초기에 북한강 상류지역까지 진출해 직접적인 지배 영역으로 삼았음을 보여주는 대단위 취락이라고 할 수 있다. |